방구석에서 시작한 VR 기기와의 동거
작년쯤이었나, 덜컥 PICO4를 샀다. 처음에는 뭐라도 된 것처럼 신나서 ‘모두의스포츠’를 켜고 거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배드민턴을 쳤다. 그때만 해도 이 기기가 내 삶을 얼마나 바꿀지 거창한 기대를 했던 것 같다. 그런데 이게 참 희한하다. 처음에 박스를 뜯고 설정을 마칠 때는 진짜 SF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인데, 막상 한 달 두 달 지나고 나니까 그냥 커다란 플라스틱 덩어리를 얼굴에 뒤집어쓰는 노동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.
비트세이버에 빠져 지내던 저녁들
한동안은 퇴근하면 무조건 비트세이버를 켰다. 40만 원 정도 주고 샀던 것 같은데, 본전은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. 운동 효과도 좋고 스트레스 풀기엔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. 그런데 점점 눈 주변이 가려워지고, 안면 폼에 묻은 땀 냄새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더라. 기기를 쓰고 나면 항상 얼굴에 자국이 남아서 거울 보기가 민망한 상황도 연출된다. 분명 즐거우려고 하는 건데,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고생하며 가상 세계를 탐험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.
현실과 가상의 미묘한 간극
최근에는 브이알챗(VRChat) 같은 곳에 들어가 보기도 했다. 사람들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, 진짜 그 방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다가도 갑자기 현실의 방 안 공기가 차갑게 느껴지면 기분이 묘해진다. GIST 연구팀에서 VR을 쓴 채로 커피 마시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기사를 봤는데, 왠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. 현실에서 뭘 하나 먹으려 해도 기기를 벗어야 하니 흐름이 툭 끊긴다. 밥 먹다가, 물 마시다가 기기 벗고 다시 쓰고… 이 과정 자체가 귀찮아서 그냥 VR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다.
왜 소방안전교육 같은 건 재미없을까
학교나 기관에서 만드는 VR 콘텐츠들도 가끔 찾아봤다. 소방안전교육 같은 거 말이다. 기획 의도는 알겠는데, 이상하게 현실감이 떨어진다. 그래픽이 문제가 아니라, 그 상황에 몰입하기엔 너무 작위적인 느낌이랄까. 차라리 인터랙티브 아트 같은 거나 예쁘게 구경하는 게 낫지, 뭔가 교육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콘텐츠들은 10분만 지나도 졸음이 쏟아진다. 고사양 컴퓨터가 있으면 더 화려한 세상이 보일까 싶어 PS5VR2 같은 것도 기웃거려봤지만, 결국은 기기 무게와 설치의 번거로움 때문에 망설이게 된다. 퀄컴에서 스냅드래곤 리얼리티 엘리트 같은 걸 내놓는다고 해도, 결국 내 목이 느끼는 무게감은 똑같지 않을까.
결국 다시 충전기 앞에 놓인 기기
오늘도 퇴근하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VR 기기를 쳐다봤다. 충전은 되어 있는데 손이 잘 안 간다. 얼굴에 쓰고 땀 흘릴 생각을 하니 의욕이 꺾인다. 누군가는 이걸로 디지털 치료를 하니 뇌과학이니 하면서 대단한 미래를 이야기하는데, 나한테는 그저 퇴근 후의 피로감을 해소하기엔 너무 무거운 장비일 뿐이다. 팔아서 치킨이나 사 먹을까 싶다가도, 또 막상 팔려고 하면 나중에 아쉬울 것 같아서 그냥 방치해 둔다. 내 방 구석 책상 위, 먼지가 뽀얗게 앉은 기기를 볼 때마다 이게 과연 나한테 필요한 물건이었는지 가끔 의문이 든다. 다음 주엔 좀 써볼까 싶다가도, 아마 그대로 방치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. 이게 정말 기술의 발전인지, 아니면 그냥 내가 나이를 먹어서 흥미를 잃은 건지 알 수가 없다.

VRChat 들어가서 사람들과 얘기하다가, 갑자기 집에서 혼자 VR 쓰는 상황이 너무 어색하게 느껴지네요.